보들레르를 시작으로 졸라, 위스망스 등 문학가들은 <살롱평(le salon)>이나 직접적인
교류를 통해 인상주의 화가들의 작업을 이해하고 대중에게 그들을 이해시키려고 애썼다. 19세기 인상주의 시대의 미술과 문학, 화가와 문인의 다양한
관계를 살펴본다.
에두아르 마네 <로슈포르의 탈출> 캔버스에 유화 80×73cm
1880∼81 파리 오르세 미술관 소장 Photo RMN - H. Lewandowski / BMF, Seoul, 2000
1994년 4월 23일에서 8월 8일에 걸쳐 파리의 그랑 팔레에서 <인상주의 탄생전>이 개최되었다. 이 전시회의
특징은 인상주의의 탄생 시기를 1859년에서 1869년까지의 시기로 선정한 것이다. 특히 1859년을 기점으로 잡은 것은 보들레르의 마지막
살롱평을 염두에 두고 기획한 것이 확실하다. 1857년 《악의 꽃》의 재판으로 인해 6편의 시를 삭제당한 시인이자 미술비평가인 보들레르는
1859년 그의 마지막 공식 미술 살롱평을 쓴다. 이 살롱평에 대해 그는 자신의 절친한 친구이자 사진사인 나다르(Nadar) ― 나다르는 후일
1874년 자신의 사진관에서 최초의 <인상주의 그룹전>을 개최한다 ― 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신은 전시회를 보지 않고 전시회 작품
목록집만을 갖고 상상에 의해 미술평을 한다는 특이한 미술비평 방법을 공개한다.
이틀 뒤 다시 나다르에게 보낸 편지 속에서 그는
사실 한 번은 전시회를 보았다고 고백하며 기억에 의한 미술비평 방법을 다시 강조한다. ‘1859년 살롱평’은 전통적인 미술비평과는 달리
보들레르에게 소중한 미학적 개념인 ‘상상력(imagination)’을 설명하기 위한 수단이며 동시에 상상력에 의해 쓰인 미술비평인 셈이다. 이
미술비평문의 ‘풍경화’장에서 보들레르는 <미술 살롱전>에 처음으로 작품을 제출한 인상주의의 선구자이며 모네(Monet)의 스승인
으젠느 부댕(1824∼1898)이 해변에서 바라보는 물과 공기의 움직임을 그린 파스텔 습작을 한 편의 산문시로 묘사한다.
“결국,
이 환상적이고 빛나는 구름들, 이 혼돈스러운 어둠들, 서로 걸쳐 있거나 덧붙여진 이 녹색과 장밋빛의 광활함, (중략) 이 모든 깊이와 이 모든
광채가 술기운 오르듯이 또는 웅변적인 마약처럼 나의 뇌수로 솟아오릅니다.”(‘1859년 살롱평’중 ‘풍경화’)
인상주의의 시작을
예감하는 이 비평문에서 보들레르는 <물가의 버드나무>, <투망>으로 우리를 찾아오는 코로와 <이삭줍기>,
<키질하는 농부>, <그레빌 성당>의 밀레(Millet)에 대하여 언급한다. 이전의 살롱평에서 프랑스 풍경화의 대가로
테오도르 루소와 코로를 극찬한 바 있는 보들레르는 ‘1859년 살롱평’에서는 “천천히, 단계별로 사람을 놀라게 하고”, “전체 속에서 각 세부의
균형 잡힌 색감을 관찰하여, 작품 구성에 대한 깊은 능력”을 지닌 유일한 화가라며 루소보다 코로를 더 높이 평가한다.
극찬에
가까운 코로에 대한 평가에 비해 밀레의 작품은 보들레르를 실망시킨다. 보들레르의 눈에 밀레의 단점은 ‘스타일’을 추구한다는 데 있다. 작품
주제에서 ‘자연스러운 시정(詩情)’을 표현하기보다는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농부들은 무엇인가를 관람객에게 요구하는 태도를 지닌다는 것이다. 밀레에
대한 이러한 보들레르의 평가 절하는 1850년대의 사실주의 운동에 대한 그의 반감과 대도시에 대한 그의 취향이 반영되어 나타난 것으로 볼 수
있다.
밀레와는 다른 사실주의 화가인 쿠르베에 대해서 보들레르의 평가는 암시적이다. 젊은 시절부터 친구로 함께 지내온 쿠르베와
보들레르는 1848년 혁명 이후 그 관계가 소원해진다. 쿠르베가 1855년 자신의 그림이 거부된 데 반대하여 <화가의
아틀리에>(1854∼1855)를 포함하여 40여 작품의 개인전시회 <사실주의, 귀스타브 쿠르베>를 열었을 때, 쿠르베와
사실주의에 대한 미술평을 준비하고 있던 보들레르는 ‘1855년 만국박람회평’에서 쿠르베를 앵그르와 함께 공격하며 암시적으로 쿠르베를 높이
평가한다.
앵그르는 전통적으로 라파엘로적인 아름다움을 추구하고, 쿠르베는 외부의 즉각적인 자연을 묘사하는 데 차이가 있지만 이 두
사람의 공통점은 ‘상상력’의 결핍, 운동감의 결핍, 그리고 둘 다 ‘반초자연주의자(anti-surnaturalistes)’들이라는 것이다.
공식적으로 공격하는 글 속에 자신의 친구를 당시의 대가와 동등하게 비교하는 보들레르의 미술비평은 대도시 파리를 프랑스 회화에 등장시킨 마네에게도
적용된다.
1880년대 역사적 사건을 배경으로 그린 <로슈포르 탈출>의 화가 마네는 프랑스 회화사상 가장 많은 문인의
애정을 받은 화가일 것이다. 이 사실은 그 당시 대중과 비평가들로부터 가장 많은 공격을 받은 화가가 바로 마네임을 역설적으로 증명해준다. 마네
자신보다 열한 살 연상인 보들레르와의 친교는 1858년부터 시작되어 시인이 죽은 1867년까지 계속된다.
마네는 《악의 꽃》에서
관능적인 여인을 묘사하는 시에 영감을 준 보들레르의 정부 ‘검은 비너스’ 쟌느 뒤발(Jeanne Duval)의 초상화 <비스듬히 누운
보들레르의 정부>(1862)를 완성한다. 보들레르는 <버찌를 든 소년>(1859)에 등장하는, 마네의 화실에서 밧줄로 목을 매어
자살한 채 발견된 젊은 모델에게 영감을 받아 1864년에 산문시 <밧줄>을 쓴다.
많은 비평가들은 ‘현대성’의 개념을
강조한 보들레르가 마네의 진정한 현대성을 발견하지 못했다고 지적하며 그가 1865년 <올랭피아>(1865)의 스캔들이 있을 때 고통을
호소하는 마네에게 보낸 유명한 구절을 인용한다. “자네는 자네 예술의 쇠퇴기에선 선두주자일 뿐이네.” 그러나 이 구절은 그 앞에 나온 구절과
연결해서 해석해야 한다. 이 말을 쓰기 전 보들레르는 마네를 문인 샤토브리앙(Chateau- briand)과 음악가 바그너(Wagner)와
비교한다.
“자네는 샤토브리앙과 바그너보다 더 천재적이라고 생각하는가? 사람들은 그들을 비웃었네. 하지만 그들은 그 비난에 굴하지
않았네.” 보들레르에게 있어서 샤토브리앙과 바그너는 문학과 음악 분야에서 최고의 찬미 대상이었다. 그는 마네를 그들과 같은 위치에서 평가한
것이다. 또한 회화의 마지막 대가는 들라크루아(Delacroix)라고 평가하는 보들레르에게 마네가 ‘쇠퇴기’의 선두 주자라는 표현은 들라크루아의
뒤를 잇는 새로운 회화의 선두주자라는 암시로 평가된다.
아카데믹한 화풍에 도전하여 펜으로 싸운 사람들
자연주의
소설가 졸라와 <바구니가 있는 정물>, <카드 놀이하는 사람들의 습작> 등을 그린 화가 세잔의 관계가 1886년 발표한
졸라의 소설 《작품(L’oeuvre)》을 계기로 소원해졌다는 사실은 이미 잘 알려져 있다. 졸라가 가장 강조한 것은 작가의 기질이다. “하나의
예술 작품은 어떤 기질을 통해서 본 우주의 한 측면이다”라는 그의 명제는 당시 미술에 대한 그의 예술관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변함없이 나타난다.
졸라의 미술비평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용어는 ‘기질’‘진리’‘개성’‘삶’이란 단어들이다 개인적으로 인상주의자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던 졸라는
인상주의에 대해 점차 초기와는 다른 의견을 갖는다.
반 고흐
<생 레미의 생 폴 정신병원> 캔버스에 유화 65×48cm 1889 파리 오르세 미술관 소장 즶Photo RMN - H.
Lewandowski / BMF, Seoul, 2000
졸라가 인상주의 화가들에 대해 반감을 갖게 된 것은 모네나 드가
같은 화가들이 성공을 거두면서 차츰 아카데미즘에 빠져드는 인상주의 때문이었다. 특히 소설 《작품(L’oeuvre)》 때문에 세잔 뿐만 아니라
인상주의 화가들과 관계가 멀어진 졸라는 인상주의가 하나의 학파로 인정받기 시작하던 1896년에는 모든 사람이 인상주의의 모방자라는 인상주의에
대한 격렬한 반론을 펼치기도 한다. 인상주의 화가들의 특성을 간략하지만 투명한 언어로 묘사한 사람은 시인 말라르메다.
상징주의
시인, ‘저주받은 시인’으로 알려진 말라르메는 보들레르, 졸라와 비교해볼 때 많은 미술평을 남기지 않았다. 그러나 1873년 마네와의 첫 만남
이후 말라르메는 마네를 화가로서 그리고 자신이 존경하던 보들레르의 친구로서 마네가 죽을 때까지 깊은 교분을 나눈다. 1876년 발표된 말라르메의
글에는 이번에 전시되는 인상주의 화가들에 대한 간략한 평이 아름다운 언어로 쓰여 있다.
“모네는 물을 사랑한다. 바다건 강이건,
회색빛의 단조로운, 또는 하늘빛의 바다나 강물의 움직임과 투명함을 표현하는 것은 그가 특별히 타고난 재능이다. 시슬레는 한낮의 사라져 가는
순간을 포착하고, 지나가는 구름을 관찰하며, 구름이 날아오르는 것을 그리는 것 같다. (중략) 피사로는 숲의 깊은 어둠과 여름, 녹색의 대지를
사랑한다. (중략) 젊은 발레리나의 반쯤 벗은 몸 주위로 빛나며 항상 변화하는 공기 같은 모슬린천과 여인의 고전적이며 동시에 현대적인 기능 중의
하나를 행하는 발레리나의 깊고, 복잡하며, 대담한 태도는 드가를 매료시킨다.”(<마네와 인상주의 화가들>)
<생
레미의 생 폴 정신병원>을 그린 반 고흐(1853∼1890)를 생각하면 시인 랭보(Arthur Rimbaud, 1854∼1891)가
떠오른다. 두 사람 모두 동시대에 활동했으며, 둘 다 37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고, 한 사람은 색채로, 다른 한 사람은 언어를 통해
새로운 예술세계를 개척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또한 둘 다 방랑자였다. 랭보는 베를렌과 함께 애증 관계를 가졌으며, 반 고흐는 아를르에서 고갱과의
논쟁 끝에 광기어린 행동으로 자신의 귀를 자른다.
랭보는 시 <모음들(voyelles)> 속에서 “A 검은색, E
흰색, I 붉은색, U 초록색, O 파란색 : 모음들이여 / 나는 언젠가 너희의 은밀한 탄생을 말하리라”하고 노래하며 언어와 색채의 상징적인
관계를 말하고, 반 고흐는 <밤의 카페>(1888)에 대하여 “붉은색과 녹색으로 인간의 끔찍한 정열을 표현하려고 노력했다”고
고백함으로써 색채의 상징성을 암시한다. 1873년과 1874년 반 고흐는 숙부의 도움으로 구필 화랑에 일자리를 얻고 런던에 거주한다. 반면
1873년 랭보는 베를렌과 함께, 1874년에는 시인이자 화가인 제르맹 누보(Germain Nouveau)와 함께 런던에 머문다. 반 고흐와
랭보는 만난 적이 없었을까? 안개 낀 영국의 밤거리에서 서로 누구인지 모른 채 스쳐 지나친 적은 없었을까?
오르세 미술관의
소장품과 함께 19세기 시인과 소설가들의 숨결도 같이 느꼈으면 하는 바람으로 몽상에 빠져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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