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다움’의 의미와 방향
시를 시처럼 만드는 것, 시의 고갱이를 질러 말하기는 쉽지 않다. 어쩌면 그것은 삶의 정의를 내리려 드는 것만큼 무모하고 난처한 노력일 수 있겠다. 삶을 살면서 삶의 비밀을 읽어내기 어렵고, 시를 쓰면서 시의 비의秘儀을 간추리기 어렵다는 것 자체가 당치 않은 역설이고 참을 수 없는 아이러니다. 삶은 무엇이고 어떻게 사는 게 올바른 살이인가 하는 문제에 매달리기보다는 바람직하지 않은 살이에 대해 밝히기가 훨씬 쉽다. 마찬가지 이유로 시의 본질를 탐구하고 좋은 시의 조건을 설명하기보다는 시를 시답게 하지 않는 요소들에 대해 따지는 것이 더 현실적일 수 있다. 그러한 경로를 통해 시를 시답게 하는 요소가 역으로 드러날 수 있을 것이다.
이 글의 텍스트로 삼은 것은 조지훈의 「승무僧舞」다. 이 작품은 1939년 『문장文章』지에 발표된 이후, 현대시의 명편으로 손꼽히며 대중의 사랑을 받아온 그의 대표작이다. 그러나 이 작품이 수십 년 동안 모아 온 성가聲價과 견줄 만한 문학적 성과를 과연 거두고 있는가 하는 점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의문을 품지 않을 수 없다. 이 글은 이러한 의문을 하나하나 풀어나가는 경로로 논의를 진행한다. 시를 시답게 하지 않는 요소를 말하는 방식도 시를 시답게 하는 요소에 대한 해명의 실마리를 마련할 수 있는 우회적 수단일 터이다.
이 글에 조지훈이 갖는 현대시사적 의의에 흠집을 낸다거나, 「승무」라는 특정 작품의 가치를 훼손하려는 생각은 들어 있지 않다. 애초의 의도 외에 다른 것이 있다면, 혹시 우리가 어떤 편견에 빙의된 채 현대시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해 온 것이 아닌가 하는 반성이다. 사기史記가 추상같이 삼엄한 사초史草에 기초해야 하는 것처럼 현대시사의 기록은 개별 작품에 대한 정직한 관찰과 준엄한 비평에 바탕을 두어야 하는 것은 두 말할 나위없다. 통념이나 고정관념을 벗고 현대시를 있는 그대로 읽고 평가하려는 노력에 인색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그에 소홀해 온 것은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다.
얇은 사紗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네라.
파르라니 깎은 머리
박사薄紗 고깔에 감추오고
두볼에 흐르는 빛이
정작으로 고아서 서러워라.
빈 대臺에 황촉黃燭불이 말없이 녹는 밤에
오동잎 잎새마다 달이 지는데
소매는 길어서 하늘은 넓고
돌아설듯 날아 가며 사뿐이 접어 올린 외씨보선이여.
까만 눈동자 살포시 들어
먼 하늘 한개 별빛에 모도우고
복사꽃 고운 뺨에 아롱질듯 두방울이야
세사에 시달려도 번뇌煩惱은 별빛이라
휘여져 감기우고 다시 접어 뻗는 손이
깊은 마음속 거룩한 합장合掌이냥하고
이밤사 귀또리도 지새는 삼경三更인데
얇은 사紗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네라.
―조지훈, 「승무」, 전문『청록집靑鹿集』, 을유문화사, 1946
시에서 언어는 의도를 전달하는 도구 이상의 위상을 지닌다. 언어는 시의 이유인 동시에 목적이며, 시의 몸 그 자체이기도 하다. 언어는 스스로의 온도와 맥박으로 시의 의미나 이미지를 임계치까지 끌어올릴 수 있다.
늦은 저녁때 오는 눈발은 말집 호롱불 밑에 붐비다
늦은 저녁때 오는 눈발은 조랑말 발굽 밑에 붐비다
늦은 저녁때 오는 눈발은 여물 써는 소리에 붐비다
늦은 저녁때 오는 눈발은 변두리 빈터만 다니며 붐비다
―박용래, 「저녁눈」, 전문.
이 시의 “붐비다”는 “말집”. “조랑말 말굽”, “여물 써는 소리”, “변두리 빈터”에서 밀집한 채 바람에 휘날리는 눈발의 모습을 선도鮮度 높게 잡아낸다. 제자리에 바꿔 넣을 다른 낱말을 상정하기 어렵다. “물새떼가 강을 들어올린다 천 마리 만 마리 천 리 만 리 소쿠라지는 울음소리”손택수, 「강이 날아오른다」의 “소쿠라지는”도 그러하다. 그것의 소리맵시는 수많은 물새떼들이 한꺼번에 날아오르는 장관의 시청각적 환상을 소름끼치도록 화려하게 돋을새김한다. 의미나 이미지의 생동감은 어떤 언어를 발굴하고 채집해 쓰는가에 달려 있을 때가 많다.
그러나 「승무」의 언어는 풍경이나 정황을 핍진감 있는 미학적 공간으로 증폭시키고 있다고 하기 어렵다. 의도를 평면적으로 전달하는 데도 적잖이 힘에 부치는 느낌이다. 문법이나 어법에 어긋난 표현도 군데군데 눈에 띈다.
1연 2행의 “접어서”의 ‘-어서’는 ‘-으므로’, ‘때문에’와 같은 문법적 기능을 하는 연결어미다. 뒷말의 ‘원인’이나 ‘이유’에 해당하는 내용을 담는다. 그렇다면 1연의 내용은 ‘얇은 비단, 매우 흰 고깔은 고이 접었으므로, 또는 접었기 때문에 나비로구나’가 된다. 이 문장이 어색한 것은 직유가 와야 할 자리에 은유가 온 탓이다. ‘나비로구나’가 아니라, ‘나비와 같구나’로 표현되어야 한다. 문제는 그렇게 읽어도 어색한 느낌이 완전히 사그라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문법에 흠결이 있어서가 아니라, 구문이 세련되지 못한 탓이다. “나빌네라”는 ‘나비일러라’, 또는 ‘나비로구나’로 풀어 쓸 수 있다. 이는 축약시킬 수 없는 두 형태소를 축약시켰다는 점에서 비일상적 문법 행위로 볼 수 있다. 소위 시적 허용이라는 시각에서 이해하더라도 별반 다르지 않다. 필경 언어의 조탁을 통해 부드럽고 가벼운 음감(euphony)의 효과를 노린 표현이겠으나, 비일상적 문법을 구사한 희생의 대가 치고 그리 큰 소득은 없어 보인다. 단지 우아한 소리맵시를 위해 언어를 조작한다면, 그러한 행위는 모국어를 다듬는 게 아니라 훼손하는 게 될 수 있다. 또 1행 첫머리의 “얇은”은 고운 견사로 짠 흰 고깔의 속이 비칠 듯한 청초한 모습을 세필細筆로 핍진감 있게 베끼기에는 너무 밋밋하고 무감각한 설명어다.
2연 “감추오고”의 ‘-오-’는 문장 속의 목적어나 부사어를 높이는 데 쓰거나, 자신을 낮추는 데 쓰는 형태소다. 따라서 ‘-오-’는 문법적으로 목적어 “파르라니 깎은 머리” 또는 부사어 “박사薄紗 고깔”을 높이거나, 시적 대상인 여승에 대한 화자의 겸양심을 드러내는 역할을 하게 된다. 그러나 전자의 가능성은 없어 보인다. 후자 역시 그다지 자연스럽지 않다. 선어말어미 ‘-오-를 쓴 것은 다른 무엇보다 시어는 우아해야 한다는 의식과 리듬의 엇나감을 비껴가려는 의도가 작용했을 가능성이 크다.
3연에 보이는 “정작으로”의 쓰임새가 적확한가도 의문이다. ‘정작’은 ①‘명사. 진짜, 진짜인 것’, ②‘부사. 막상, 실지로’의 뜻이다. “정작으로”는 ‘정작’에 보조사를 붙여 의미를 강조한다. 따라서 “정작으로”는 ‘막상’, ‘실지로’가 강조된 표현으로 이해할 수 있다. 즉 ‘사상事象의 진상眞相 그대로’의 뜻을 품는다. 비슷한 말인 ‘진짜로’는 ‘정말로’와 더불어 구어에서 ‘매우’라는 뜻으로 쓰이기도 한다. 그러나 ‘정작’, 또는 ‘정작으로’가 ‘매우’의 뜻으로 쓰이는 수는 없다. 이 연의 “정작으로”는 문맥에 비추어 볼 때 ‘매우’라는 뜻으로 잘못 사용되었다. ‘진짜로, 또는 정말로 고와서 서러워라’는 가능하지만, ‘정작, 또는 정작으로 고와서 서러워라’는 가능하지 않은 표현이다.
6연의 “눈동자 살포시 들어”에서도 낱말 선택의 문제를 노출한다. “들어”는 부적절한 낱말이다. 고개나 턱은 ‘들어’ 올린다는 표현을 써도, 눈동자는 ‘들어’ 올린다는 표현을 쓰지 않는다. ‘들어’는 ‘치떠’혹은 올려 떠으 바꿔 쓸 수 있겠지만, 이번에는 “눈동자”와 충돌을 일으킨다. ‘눈’은 ‘치뜬다’고 표현할망정, ‘눈동자’는 ‘치뜬’다고 표현하지 않는다. 문맥에 따라 눈을 치떠 별빛을 본다는 것으로 이해해도 문제는 여전히 남는다. 아무래도 “먼 하늘”의 “별빛”을 눈을 치떠 바라보는 여승의 모습은 어색하다. 그것도 별빛을 통해 비로소 “관능의 샘솟는 노출을 정화淨化”(조지훈, 『시의원리』, 산호장, 1956)시키게 된 여승이 그것을 고개를 들어 바라보는 게 아니라, 눈을 치떠 바라보는 것은 상상하기가 어렵다. 마찬가지 맥락에서 “모도우고”의 쓰임새도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모도다’는 ‘모으다’의 고어다. 문맥에 비추면 “눈동자”를 ‘모으는’ 것으로 볼 수 있는데, ‘시선’을 ‘모은다’는 표현은 사용해도 ‘눈동자’를 ‘모은다’는 표현은 사용하지 않는다. “눈동자 살포시 들어”가 ‘고개를 살포시 들어’의 수사적 표현이고, ‘눈동자를 모으고’가 ‘시선을 모으고‘의 수사적 표현으로 받아들여도 이러한 의문은 잘 희석되지 않는다. 시적 효과를 살렸다는 느낌보다는 어법을 어색하고 서투르게 조작했다는 인상이 훨씬 더 짙기 때문이다.
7연 “아롱질듯”에서도 낱말 선택에 문제가 있는 듯이 보인다. ‘아롱지다’는 ‘아롱아롱한 무늬가 생기다’의 듯이다. ‘아롱아롱’은 ①‘눈앞에 흐리게 아른거리는 모양’을 가리키거나, ②‘어떤 바탕에 작은 점이나 무늬 따위가 고르게 촘촘히 무늬져 있는 모양’이다. 먼저 ②는 “두방울”의 눈물이 “뺨”에 ‘고르게 촘촘히 무늬져 있’기 어렵다는 이유에서 선뜻 동의하기 어렵다. 설혹 의미가 통한다 하더라도 이미 뺨에 맺혀 있는 눈물은 ‘아롱져 있는’ 것이지 ‘아롱질 듯’한 것은 아니다. ①은 한밤중 여승의 뺨에 맺힌 눈물방울이 화자의 눈에 ‘흐리게 아른거리는’, 즉 보일 듯 말 듯할 수 있다는 점에서 가능성을 열어 둘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아롱질듯”의 ‘듯’과 충돌을 일으킨다. ‘듯’이 중복되면서 의미가 무너진다. 이 해석대로라면 ‘아롱지는 두 방울이야’로 표현되어야 한다. 필경 눈물방울이 굵게 맺혀 ‘곧 떨어질 듯’ 아슬아슬한 모양을 우아하게 표현할 의도로 “아롱질듯”을 선택했겠지만, 결과적으로 엉뚱한 낱말을 쓴 것이 되었다.
8연은 마음 속에서 합장을 하듯이 거룩한 심정으로 손을 저어 춤을 춘다는 내용을 담는다. 그러나 표현 의도가 제대로 전달되지 않고 뭔가 어색하다. 춤사위에 한창인 손맵시를 매우 정적인 이미지인 합장으로 비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원관념인 “손”과 보조관념인 “합장”의 거리가, 마치 ‘원추리꽃 같은 달맞이꽃’처럼, 겹쳐질 만큼 가까운 것도 비유로서 어색하게 느껴지는 중요한 이유가 된다. 더구나 5연 “소매는 길어서 하늘은 넓고”에서 알 수 있듯이 소매에 긴 한삼자락을 두르고 춤추는 여승의 손이 화자에게 드러나 보일 수는 없다. “손”을 묘사하는 것은 처음부터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또 “거룩한”은 “합장”이 내포하고 있는 의미와 중복된다. “합장”의 의미를 보충하는 수식어가 들어가야 한다. 강조의 기능을 한다고 이해할지라도 상식적인 내용을 앞장서 설명하는 형국이다. 시적인 표현법과는 거리가 멀다. 5연의 “빈”, “말없이”와 마찬가지로 숨결을 맞추기 위해 무의미하게 끼워넣은 수식어로 여겨진다.
9연은 “지새는”과 “삼경三更”이 모순을 일으킨다. ‘지새는’은 ‘잠을 자지 않은 채 밤을 보내고 새벽을 맞는’의 뜻이고, ‘삼경三更’은 밤 11시에서 1시 사이의 한밤중을 가리킨다. 그렇다면 이 부분은 ‘귀뚜라미도 밤을 지새우는 한밤중인데’로 풀이된다. 의미가 교란되고 있다는 인상을 지우기 어렵다. ‘귀뚜라미도 울음 우는 삼경인데’ 정도로 표현되어야 한다. 만약 “지새면”을 살린다면 ‘귀또리도 지새는 육경六更인데’ 비슷하게 쓸 수 있다. 귀뚜라미는 울고 있지만 오동잎은 아직 달빛을 반사시킬 만큼 충분히 윤기가 남아 있다는 점에서, 이 시의 계절은 초가을로 추정할 수 있고, 초가을의 해는 육경 무렵에 떠오른다. 이는 “그리고 마지막 춤과 음악이 그친 뒤 교교皎皎한 달빛과 동터오는 빛으로서 끝막을 것”조지훈, 앞의 책이라는 시인의 의도에 충실히 복무한다. 그러나 이러한 가능성은 결정적으로 행의 첫부분 “이밤사”와 정면으로 충돌한다.
이 시에 드러난 언어 사용의 문제는 무엇보다 언어에 대한 이해와 인식이 성숙하지 못한 까닭에서 비롯한다. 언어에 대한 투철한 이해와 인식, 또는 언어의 리얼리티보다 전편에서 더욱 두드러지게 감지되는 것은 시어는 우아해야 한다는 일종의 강박관념 같은 것이다. 문법이나 어법 훼손의 흔적, 그리고 “모도우고”와 “감기우고”에서 조음소 ‘-우-’를 삽입해 늘여 쓴 것도 많은 부분 우아하게 표현해야 한다는 의식으로 말미암는 성싶다.
다음으로 이 시의 내용에 대해서 살펴보자. 이 작품은 승무에서 모티프를 구한다. 조지훈 자신의 로드맵에 따르면 승무를 통해 “인간의 애욕 갈등, 또는 생활고의 종교적 승화 내지 신앙적 표현”조지훈, 앞의 책을 하거나, “관능의 샘솟는 노출을 정화淨化”(조지훈, 앞의 책)하는 것이 의미구조의 중추를 구성한다.
까만 눈동자 살포시 들어
먼 하늘 한개 별빛에 모도우고
복사꽃 고운 뺨에 아롱질듯 두방울이야
세사에 시달려도 번뇌煩惱은 별빛이라
여승은 춤사위 가운데 “먼 하늘”의 “별빛”을 응시하면서, 젊은 여성으로서 갖는 “애욕”을 다스리고 “생활고”로 인한 “번뇌”를 이겨낸다. 시의 핵심이랄 수 있는 이 장면은 중대한 오류를 품는 것으로 보인다.
“복사꽃 고운 뺨”은 “관능의 샘솟는 노출”을, “아롱질듯 두방울이야”는 그것이 눈물로 “정화”되는 모습을 형상화한다. 문제는 양립할 수 없는 두 가지 심리적 양상이 거의 동시에 드러난다는 사실이다. “고운 뺨”에서 “복사꽃”처럼 새뜻이 붉은, 야하게 분출하는 에로티시즘을 연상한 화자가 그 위를 타고 흐르는 눈물에서 느닷없이 그것의 정화를 동시에 떠올리는 것은 분명한 이율배반이다. 동일한 화자라면 그 눈물은 관능미를 더욱 심화시키는 작용을 할 가능성이 짙다. 정상적 정서의 화자는 ‘관능미’이든 ‘정화’든 한 가지만을 느끼게 된다. 여승의 입장에서 보아도 다르지 않다. 여성으로서의 관능미가 한껏 고조高調된 상태에서 그것의 정화를 경험하는 것은 아무래도 현실적이지 않은 듯하다. 두 가지 경험은 동시에 겪을 수 있는 게 아니라 시간의 흐름을 두고 순차적으로 겪을 수 있는 성질의 것이다. “복사꽃 고운 뺨”인 채로 관능이 정화되는 체험을 하기는, 화자의 입장에서 볼 때도 마찬가지지만, 시소의 양끝이 동시에 올라가는 것처럼 불가능하다.
“세사에 시달려도 번뇌煩惱는 별빛이라”는 세상사로 말미암은 번뇌가 별빛을 바라보면서 별빛처럼 멀어지는 듯이 느끼는 정황을 표현한다. 여승이 맞닥뜨린 사적인 현실은 알 길이 없지만, 이미 불가에 입문해 승적을 지닌 그녀가 “세사에 시달”리는 모습은 선뜻 이해하기 어렵다. ‘아직 완전히 끊지 못해 고통스러운 세상과의 인연’으로 정당화시킬 수도 있겠지만, 그것을 ‘세사에 시달린다’라 하지도 않을 뿐더러, 시인 스스로 그것을 “생활고”라 설명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별빛을 통해 “애욕”을 극복한다는 설정은 좀 당혹스런 픽션의 티가 날망정 수긍할 수 있다 여기더라도, “세사”, 또는 “생활고”를 초월한다는 설정은 납득하기 어렵다. “애욕”은 한 개인의 깨달음으로 이겨낼 수 있겠지만, “세사”, 또는 “생활고”는 한 개인의 깨달음만으로 이겨내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 부분은 젊은 여승이 애욕으로 말미암은 육체의 갈등과 세상일로 말미암은 정신적 압박을, 한밤중 홀로 승무를 추는 과정에서 별빛과의 조우를 통해 깨달음을 얻고 동시에 극복한다는 내용이다. 속기俗氣뿐 아니라 작위적이란 느낌이 강하다. 좋은 시는 솔기가 만져지지 않은 무봉無縫한 형식을 지닌다는 점에 비추면 더욱 그러하다.
목어木魚를 두드리다 / 졸음에 겨워 //
고오운 상좌 아이도/ 잠이 들었다. //
부처님은 말이 없이 / 웃으시는데 //
서역西域 만리萬里ㅅ길 //
눈부신 노을 아래 / 모란이 진다.
―조지훈, 「고사古寺1」, 전문.
봄날 오후에서 해질녘까지의 절집 풍경을 묘사하는 작품이다. 어깨에 힘이 들어가지 않은 채 화자는 절집의 일상을 무심한 듯 베껴낼 따름이다. 관념이나 의도의 솔기는 만져지지 않지만, 어린 스님의 잠, 부처의 미소, 노을빛 아래 지는 모란이 조응하며 빚어내는 풍경은 그대로 한 편의 조촐하고 아름다운 연화장蓮華藏세계를 빚어낸다.
이 시 전체의 의미틀을 들여다봐도 작위적이라는 느낌이 든다. 구경꾼의 흔적도 삼현육각三絃六角의 음률도 노출되어 있지 않고 대 위도 비어 있다. 여승이 춤을 추는 정황이 남에게 보이기 위한 공연의 성격을 띠는 것이 아니라 사사로운 사정에 따른 것임은 자명하다. 젊은 여성이 애욕과 세상일로 고통스러워하다가 한밤중에 일어나, 더구나 복식까지 갖추고 달빛 아래 촛불을 켜 놓은 채 홀로 춤을 추는 장면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것은 물론 아니지만, 뭔가 낯설고 부자연스럽다는 생각을 지우기 어렵다.
이 시가 작위적이라는 느낌을 갖게 하는 또 다른 원인으로 들 수 있는 게 승무의 의미에 대한 혼선이다. 승무는 글자가 지시하는 그대로 스님이 추는 춤일 수도 있고, 민속춤의 한 갈래인 춤일 수도 있다. 민속춤의 한 갈래로서의 승무는 스님의 춤이 아니라, 광대나 기생이 단지 승복을 입고 추는 춤이다. 불교 의례에서 승려가 추는 춤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승려의 춤, 살풀이춤, 궁중무, 또는 탈놀이의 장삼춤에서 영향을 받아 교방敎坊예술로 발전한 것으로 보는 게 일반적이다. 이는 협률사, 원각사, 광무대 등의 권번券番에서 활약하고 있던 재인들에 의해 공연된, 보여 주기 위한 무대예술의 성격을 띤다. 시인의 회고에도 나오지만, 이 시의 승무는 흰 고깔, 긴 한삼자락 등의 복식이 그대로 묘사된 것으로 보아 무대예술인 승무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시에 나타난 에피소드가 지시하는 것은 애욕과 세상사에 시달리는 여승이 홀로 추는 사사로운 춤사위다. 이는 민속춤인 승무의 춤사위 끝부분 주제가 속진俗塵을 벗어나 하염없는 니르바나를 표상한다는 것에서 힌트를 얻은 듯하다. 결국 한 여승이 애욕과 세상일로 인한 고뇌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속세의 춤인 승무를 모방해 추는 형국이 되었다. 승무에 대한 화자의 혼동 내지 착종은 진정성을 의심하게 되는 배경이 될 수 있다.
시인의 말에 따르면 구왕궁舊王宮 아악부雅樂部에서 「영산회상靈山會相」을 들은 것이 집필 계획을 구체화시키게 된 계기가 된다. 그것이 승무의 여러 유래설 가운데 하나인, 건달파乾達婆이 ‘영산회상’의 장엄한 광경을 묘사한 것으로 보는 견해와 어떤 관련이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4음보가 주조를 이루는 이 시의 율격과 「영산회상」의 전아典雅하고 유장한 율격은 조응하는 듯이 보인다. 이 시의 운율을 음보 단위로 표시하면 아래와 같다.
얇은 사紗 ∥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 나빌네라.
파르라니 ∥ 깎은 머리
박사薄紗 고깔에 ∥ 감추오고
두볼에 ∥ 흐르는 빛이
정작으로 ∥ 고아서 ∥ 서러워라.
빈 대臺에 ∥ 황촉黃燭불이 ∥ 말없이 ∥ 녹는 밤에
오동잎 ∥ 잎새마다 ∥ 달이 지는데
소매는 ∥ 길어서 ∥ 하늘은 ∥ 넓고
돌아설듯 ∥ 날아 가며 ∥ 사뿐이 ∥ 접어 올린 ∥ 외씨보선이여.
까만 ∥ 눈동자 ∥ 살포시 들어
먼 하늘 ∥ 한개 ∥ 별빛에 ∥ 모도우고
복사꽃 ∥ 고운 뺨에 ∥ 아롱질듯 ∥ 두방울이야
세사에 ∥ 시달려도 ∥ 번뇌煩惱는 ∥ 별빛이라
휘여져 ∥ 감기우고 ∥ 다시 접어 ∥ 뻗는 손이
깊은 ∥ 마음속 ∥ 거룩한 ∥ 합장合掌이냥하고
이밤사 ∥ 귀또리도 ∥ 지새는 ∥ 삼경三更인데
얇은 사紗 ∥ 하이얀 고깔은 ∥ 고이 접어서 ∥ 나빌네라.
(‘∥’는 끊어 읽는 단위를 표시함)
모두 9개의 연 가운데 1․2․7․8․9연은 4음보로, 3․4․5․6연은 변형된 음보로 짜여진다. 심혈을 기울여 운율을 고르고 다듬은 흔적과 별개로 엇박자가 드러나기도 한다.
3연은 5음보로 짜여 있다. 1행에서 “흐르는”과 “빛”을 끊어 3음보로 읽는 것은 가능해 보이지 않는다. 그렇게 되면 율조를 느끼기 어려울 정도로 숨결이 느슨해진다. 이 연은 율격의 아귀가 꽉 조여져 있지 않다. 단순히 4음보가 다른 음보로 변형되었기 때문은 아닌 듯하다. 이는 4연의 경우 4음보와 3음보가 결합된 변격이지만, 숨결이 제대로 갈무리된 데서 알 수 있다. 그 까닭은 2행 첫음보 “정작으로”에 책임이 있다. 4음절의 소리마디가 숨결의 매끄러운 흐름을 망가뜨린다. 이를 ‘정작’으로 바꾸면 한결 산뜻하고 탄력 있는 숨결을 얻게 된다. “으로”는 통사적으로 불필요한 낱말이다.
5연에서도 율격은 균형을 완전히 잃는다. 1행의 4음보율은 빠르지는 않지만, 한삼자락을 산들바람에 가볍게 날리며 춤추는 이미지를 성공적으로 빚어낸다. 그러나 2행에 이르러서는 율격이 생생한 탄성彈性을 잃고 거칠고 메마른 경직상태에 빠진다. 5음보를 내리 읽도록 하는 형식은 가파른 내리막길을 무거운 수레가 돌진하는 것을 보는 것 같다. 빠르게 움직이는 춤사위를 경묘한 숨결에 태워 전달하려는 애초의 의도를 살리지 못했다. 속도감은 얻었지만 거기에 필연적으로 따라야 하는 춤사위의 생동하는 가벼움을 얻는 데 실패했기 때문이다. 단순히 한 행을 채우는 음절수의 변화로 속도감의 변화를 이끌어내려는 책략은 너무 소박하다. 조지훈의 시 가운데 율격을 한결 세련되게 살린 시로 「낙화落花」를 들 수 있다.
①주렴 밖에 성긴 별이
하나 둘 스러지고
②귀촉도 우름 뒤에
머언 산이 닥아서다.
③초ㅅ불을 꺼야 하리
꽃이 지는데
④꽃지는 그림자
뜰에 어리어
⑤하이얀 미닫이가
우련 붉어라.
⑥묻혀서 사는 이의
고운 마음을
―조지훈, 「낙화」, 부분
이 부분에서 가장 빠른 속도감을 자아내는 게 ③이다. 그리고 그것은 ④에서 ⑤로 차츰 줄다가 ⑥에서는 ①, ②와 별 차이 없이 완만하게 숨결을 가다듬는다. 음절수에서 ③, 또는 ④와 ⑤는 다른 연보다 많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 급하게 읽히는 것은 의미의 간섭을 받았기 때문이다. 음절이 구성하는 의미도 율격의 빠르기에 영향을 준다. 이 시의 율감이 결곡하고 정련된 느낌을 주는 것은 시조나 창가류의 3음보․4음보격처럼 음보율이 돌출하지 않으면서도 그 음보의 특성을 별 손실 없이 살리고 있기 때문이다. 「승무」와 비교해 읽으면 음감의 차이가 선명히 드러난다
춤사위의 속도감과 생동하는 가벼움은, 일단 다른 연과의 균형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5연 2행을 두 개의 행으로 처리했을 때 모두 살려낼 수 있다.
소매는 ∥ 길어서 ∥ 하늘은 ∥ 넓고
돌아설듯 ∥ 날아 가며
사뿐이 ∥ 접어 올린 ∥ 외씨보선이여.
행을 채우는 음절수와 상관없이, 1행보다 2행과 3행이 명백히 빠른 율감을 느끼게 한다. 이렇게 처리했을 때 춤사위의 가벼움을 살리면서도 원시의 속도감과 큰 차이가 없는 것은 “돌아설듯 날아 가며”의 의미의 간섭에 힘입은 바 크다. 여기에 “사뿐이” 같은 부사어가 행의 앞에서 탄력을 조율하는 것도 가볍고 빠른 음감을 유인하는 데 도움을 준다. 원시 1행과 2행 사이에 나타난 율격의 불화不和은 2행을 둘로 나누면서 부드럽게 극복된다.
8연은 4음보의 두 행으로 구성되는 것처럼 보인다. 1행은 4음보격의 유장한 특색을 제대로 살린다. 그에 비해 2행의 4음보는 율격이 탄력을 잃은 채 마구 흐트러진 느낌이다. 단순히 음절수의 변화 때문만은 아닌 듯하다. 구문상의 문제, 즉 꾸미는 말과 꾸밈을 받는 말로 구성된 두 구절이 숨결의 균형을 잃은 채 나란히 단순 배열된 탓일 가능성이 있다. “깊은”과 “마음속”을 한 숨결로 아울러도 율격이 걷잡을 수 없이 혼란을 일으키는 건 마찬가지다.
이 시는 마지막 연 2행에서 1연의 1․2행을 그대로 반복 ․ 압축하면서 끝을 맺는다. 이러한 형식은 시의 내용과 어울리지 않는다. 1연은 춤추기 직전 여승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으며, 마지막 연 2행은 춤사위를 막 끝낸 그녀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춤추기 직전보다는, 춤사위를 마치고 멈춰 있을 때가 한층 고요한 느낌을 준다. 더욱이 “귀또리” 소리의 背音 속에서 달빛을 받으며 춤을 막 멈춘 여승의 마지막 장면은 정밀감靜謐感마저 느끼게 할 수 있다. 마지막 연 2행은 1연보다 더 고요하고 유장한 율격으로 처리하거나 최소한 같은 질의 율격으로 처리해야 했다. 그러나 이 시에서는 1연 전체의 내용을 마지막 연에 부속하는 하나의 행으로 처리한다.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은 가파른 율격은 에피소드가 품을 수 있는 정밀한 여운을 살리는 데 실패한 이유로 작용한다. 서둘러 서랍을 닫듯이 황급히 끝맺는 형국이 되고 말았다.
이상 몇 가지 방향에서 「승무」가 지니는 의문점들을 짚어 보았다.
첫째, 정황에 어울리지 않을 뿐 아니라 무전략적으로 비치는 시어를 선택한 경우가 눈에 띤다. 이는 언어에 대한 이해와 인식이 부족한 것도 원인으로 들 수 있지만, 무엇보다 시어는 우아해야 한다는 의식이 크게 영향을 미친 듯하다. 이 시에서 군데군데 발견되는 낯설고 어색한 문법이나 어법도 이러한 의식, 또는 ‘멋부려 표현하기’의 흔적이 짙게 배어 있다.
둘째, 시상의 흐름에 작위성이 노출된다는 점이다. 한 여승이 애욕과 세상일에 시달리다 한밤중 홀로 춤을 추면서 문득 별빛의 세례를 받고 그것을 초극한다는 설정은, 리얼리티나 디테일한 인과관계는 따지지 않더라도 관념과 의도가 날것 그대로 드러난다. 주제를 육화시키지 못한 것은 표현 능력이 관념과 의도를 제대로 다스리고 아우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율격을 효과적으로 갈무리하지 못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춤사위의 리듬을 언어의 율격에 실어 전달하려는 뜻에서 시조나 가사에 가까운 돌출한 4음보를 바탕에 깔았다. 돌출한 4음보도 현대시라는 관점에서 그리 세련된 수법이라 보기 어렵지만, 더 큰 문제는 율격의 뒤엉킴이다. 특히 의미와 율격이 한데 어우러져 읽히는 시에서 그건 가볍게 지나칠 사안이 아니다. 율격뿐 아니라, 그에 미묘하게 간섭하는 언어 감각이 세련되지 않은 것에 책임이 있다.
이러한 시 읽기는 지나치게 세밀한 눈금을 작품에 들이댄 것이 아니냐는 의심을 살 수 있다. 시를 대중가요처럼 단순히 개인의 입맛대로 즐기고 버리는 아마추어다운 처지라면 그럴 수 있다. 하지만 시의 가치를 따지고 잰다는 비평적 입장에서는, 하물며 개별 작품에 대한 비평이 현대시사를 정리하는 전제적 작업이라는 엄중한 의미를 띨 수 있다고 한다면, 아무리 세밀한 눈금으로 이리저리 살펴볼지라도 지나치지 않다. 오히려 그것은 연구자가 지켜야 할 의무다.
조지훈의 「승무」는 현대시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이나, 현대시의 명편으로 간주하는 대중의 인식과 작품이 지니는 문학적 완성도 사이에 넘기 어려운 틈이 도사린다. 이와 같은 현상이 비단 이 작품에만 국한되지 않는다는 사실은 시인에게든 연구자에게든 불행하고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현상의 가장 큰 책임은 수십 년에 걸쳐 어느 정도 정평이 있는 시인과 작품을 무비판적․무반성적으로 받아들이는 비평적 관행, 그리고 ‘권위 있는 것’에 대한 문제 제기를 애써 피하거나 심지어 금기시하는 학문적 풍토에 있다.
「승무」에 나타난 문제를 도려내 풀어헤치는 경로를 밟아 시를 시답게 하는 요소들에 대한 단서를 우회적이고 부분적이나마 밝히려 했다. 언어나 문법과 어법은 적확하게 구사되어야 한다. 비일상적 표현이 시이기 때문에 용인될 수 있다는 발상은 매우 위험하다. 고도의 문학적 효과를 노리기 위해 어쩔 수 없는 예외적인 경우가 아니라면, 그것은 최대한 피해야 한다. 시를 시답게 하는 요건으로 놓칠 수 없는 것이 무봉한 의미 구조다. 흔히 진정성을 얻는 데 실패했을 때 작위성이 노출된다. 진정성은 사실 여부와 관계없이 시의 대상에 대한 정직한 접근으로부터 비롯한다. 투신에 가까운 대상을 향한 감정이입을 통해 관념또는 의도은 시의 몸 안에서 육화될 수 있으며, 그때 진정성을 얻을 수 있다. 현대시에 있어서 운율은 시를 시답게 하는 필요조건의 성질을 지니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것이 헝클어져 있다면 사뭇 문제가 다르다. 특히 율격을 표현의 주요 전략으로 삼은 시에서 엇박자가 노출된다면 이미 시다운 시, 좋은 시가 될 수 없다.
덧붙인다면, 소위 ‘시의 품격과 위의威儀’를 담보하는 요소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시를 타고 흐르는 정서다. 시가 언어로 표현된 이상 어떤 형식이든 화자가 지니는 정서의 결은 드러나기 마련이다. 그것은 언어․음악․이미지 따위와 교응하며, 시의 품격과 위의를 재는 꽤 요긴한 수단으로 쓰일 수 있다. 아래의 글을 인용하면서 이 글을 마친다.
여기에서 좋은 시가 품는 정서의 품격으로 따진 것은, 공자가 관저關雎의 시를 놓고 말한 애이불상哀而不傷, 낙이불음樂而不淫의 정조다. 이천 년을 훨씬 넘는 시간과 격절한 발언이 첨단 디지털시대에서 시의 본질을 명민한 비수처럼 가른다.
소월의 「진달래꽃」을 두고 애이불상 운운하는 것을 흔히 보게 된다. 하지만 이는 ‘슬프되 슬퍼하지 않는다’는 그것의 축자적 해석과 ‘슬픔을 눌러 참는다’는 시의 의미를 소박하게 단순 대응시킨 데서 발생한 오류다. 나는 애이불상을, 슬픔을 사사로운 슬픔으로부터 맑게 침전시켜 객관적 슬픔으로 승화昇華시킨 데서 유로되는 정조로 해석한다. 이처럼 슬픔이 보편화되는 경로에서 소위 비애의 미학이 비로소 탄생한다. 이는 슬픔을 이겨낸다거나 슬픔의 농도가 희석된다거나 하는 것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어쩌면 이때 슬픔의 빛깔은 더욱 절절할 수 있다. 나는 애이불상의 전형적인 모습을 박재삼의 “제삿날 큰집에 모이는 불빛도 불빛이지만/해질녘 울음이 타는 가을강江을 보겄네”「울음이 타는 가을강江」에서 즐겁게 목격한다.
내게 낙이불음이라는 표현과 먼저 겹쳐 떠오르는 것은 소위 해체로 분류되는 시들이다. 물론 다 그렇다는 뜻은 아니다. 어떤 시들에서는 얼마 전 한 음악프로그램에서 벌어졌던 어느 인디밴드의 난행이 연상된다. 그렇다고 파괴와 일탈, 또는 저항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파괴와 일탈, 또는 저항은 분명 깨끗하고 상쾌한 기쁨이나, 어떤 성실성 같은 것을 담보할 수 있다. 그러나 해체의 유행을 탄 몇몇 시들에서 느껴지는 것은 그러한 것이 아니라, 불행하게도 비겁하고 음습한 모독冒瀆이나, 천하고 잔인한 쾌감 비슷한 종류의 것들이다. 낙이불음의 정조는 상주 모심기노래에서 극적으로 돋을새김된다. “모시야 적삼에 반쯤 나온 연적 같은 저 젖 좀 보소 많이야 보면 병난다네 담배씨만큼만 보고 가소”에서 내가 느낀 것은 낭창낭창 얄밉도록 개구진 여유도 여유지만, 거기에서 뿜어 나오는 순정한 즐거움이다. 순정성은 시와 이음동의어다.
―오태환, 『별빛들을 쓰다』, 황금알, 2005